[영화 카피의 비밀] 20자의 마술..."한 줄에 영화를 담는다

2008. 6. 18. 20:14카테고리 없음

만약 영화 '쿵푸팬더'의 메인카피가 '포스작렬', '하면된다' 대신 '팬더모니엄'(pandamonium)이었다면 어땠을까.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국가에서는 '팬더 바람이 분다'라는 뜻을 가진 '팬더모니엄(pandemonium의 변형) 비긴스 순'을 영화 포스터의 메인카피로 썼다.

영화를 보기 전 맨 처음 관객과 소통하는 끈, 바로 영화 포스터의 카피다. '쿵푸팬더'의 경우 '포스작렬'이라는 티저카피와 '하면된다'라는 메인카피를 사용했다. 영화를 수입한 CJ엔터테인먼트 권성준 과장은 "국내 정서에 맞는 카피를 짓기 위해 고민했다. 주인공 '포'의 이미지를 살리는 동시에 사자성어가 유행인 트렌드를 반영하고 싶었다"며 '포스작렬'이 등장한 배경을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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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번, 영화 '쿵푸팬더'의 메인카피가 '팬더모니엄'이라면 어땠을까. '포스작렬'이나 '하면된다'처럼 관객의 시선을 잡아 당길 수 있었을까. "저게 무슨 말이야?"라는 식의 의문을 갖게할 순 있었겠지만 "저 영화를 꼭 봐야겠다"는 실천으로 이끌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카피의 힘이다.

'잘 나온 카피 한 줄, 열 배우 안 부럽다' 했다. 카피가 영화의 흥행에 미치는 영향을 설명하는 예다. 카피는 관객을 영화로 이끄는 일종의 안내서다. 동시에 영화에 대한 관심을 끌어 올리는 도구며, 관심을 관람으로 연결시키는 창구다. 영화 관계자들은 카피를 두고 '20자의 마술'이라 정의하는 것도 이 때문 아닐까.

한 줄의 미학, 20자의 마술. 영화 카피의 세계를 집중취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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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줄의 미학…"카피, 이렇게 만들어진다"

"그녀의 S라인 뒤에 숨겨진 살 떨리는 비밀" (영화 '미녀는 괴로워')

관객에 보여지는 것은 단 '한 줄'일지 모른다. 하지만 2시간 짜리 영화 한 편을 함축하는 그 한 줄을 쓰기 위해서는 꽤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유일의 영화 전문 카피라이터 윤수정씨에 따르면 20자 안팎의 카피가 나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짧게 3개월에서 길게 7개월. 산고 끝에 옥동자란 말이 딱 들어 맞는다.

지난 2007년 전국 관객 662만명을 동원한 영화 '미녀는 괴로워'를 통해 카피가 나오는 과정을 살펴보자. 당시 영화의 티저카피와 메인카피를 담당했던 윤수정씨는 "대개 제작단계에서 시나리오를 보고 카피를 구상한다"면서 "시나리오를 읽으며 여러가지 카피안을 내고 포스터가 나오면 카피안을 수정하거 아예 새로운 카피를 떠올리기도 한다"고 말했다.

'미녀는 괴로워'의 티저카피인 '그녀의 S라인 뒤에 숨겨진 살 떨리는 비밀' 역시 이런 과정 속에서 탄생했다. 윤씨는 "사실 시나리오가 명쾌하면 카피도 금방 떠오른다. '미녀는 괴로워'의 경우 시나리오 부터 감이 왔다. 읽으면서 여러가지 가안이 떠올랐고 후에 포스터를 보는 순간 '살 떨리는 비밀'이라는 카피가 터져 나왔다"고 설명했다.

한국영화의 카피작업은 윤씨의 말처럼 제작단계에서 부터 시작된다. 시나리오를 읽고 영화와 캐릭터에 대한 이해를 마친 뒤 1차 포스터를 보고 티저카피를 만든다. 이후 수정작업을 거쳐 개봉 전 메인카피를 완성한다. 반면 외화의 경우 비교적 간단한 프로세스를 거친다. 개봉시기가 결정되면 마케팅 작업 동시에 카피작업에 들어간다. 1~2개월 내에 전반적인 마케팅이 진행되므로 임팩트 있고 날카로운 카피를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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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자의 마술…"영화를 담는 원칙이 있다?"

"쎈 놈만 살아 남는다" (영화 '강철중')

그냥 생각나는 대로 쓰는 게 아니다. 카피를 만드는 데도 일정한 원칙이 있다. 아무리 무형식의 예술이라 해도 시대의 흐름과 관객의 트렌드를 외면할 수 없는 입장. 최근 몇 년간 나온 카피를 살펴보면 반복되는 흐름을 알 수 있다. 그 중 영화 '강철중'의 카피는 첫번째 흐름인 시대상과 관련있다.

'쎈 놈만 살아 남는다'라는 티저카피를 만든 이노기획 측에 따르면 '강철중' 카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이노기획 측 관계자는 "영화 내적인 접근과 더불어 외적인 상황을 반영했다"면서 "지금 충무로는 내화의 불황과 외화의 공세 속에 그 어느 때 보다 춥다. 이에 좋은 영화는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작품에 대한 자신감의 표현이자 살아 남겠다는 의지의 표출인 셈이다.

영화 속 카피는 시대상 뿐 아니라 시대의 유행도 반영한다. 앞서 언급한 '쿵푸팬더'가 대표적인 예. 최근 유행 중인 사자성어를 적극 반영한 경우다. CJ엔터테인먼트 김종원 팀장은 "전세계 카피인 '팬더모니엄'에 대한 거부감이 있었다. 타켓층에 익숙한 4글자 놀이에 맞추자는 의견이 있었고, '포스작렬'과 '하면된다' 등의 임팩트 강한 카피가 탄생했다"고 말했다.

물론 4글자라 해서 아무 의미없이 지은 것은 아니다. 김 팀장은 "티저카피인 '포스작렬'의 경우 캐릭터인 '포'가 쿵푸 고수가 돼 발산하는 포스를 표현하고 싶었다. 메인카피인 '하면된다'는 국수 가게라는 가업을 포기한 채 자신의 꿈을 이뤄가는 드라마틱한 과정을 함축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유행과 캐릭터, 스토리의 결합이 단 4글자로 완성된 경우다.

이 외에도 스토리보다 비주얼을, 내용보다 장르를 강조한 카피도 있다. 예를 들어 '친절한 금자씨'의 '받은 만큼 드릴께요'는 영화 컨셉트보다 비주얼에 어울리는 카피다. 영화 '투사부일체'의 '어서 가서 웃기자'는 내용보다 코믹영화라는 장르가 강조된 카피다. 반면 '오 브라더스'의 '형 어디가? 너 버리러!'나 '사랑'의 '지랄 같네, 사람 인연'은 무엇보다 내용전달에 초점을 맞춘 카피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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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피란 무엇일까…"아이라인과 같은 것"

사실 '카피'는 바쁘다. 한 줄로 스토리도 말해야 하고, 캐릭터도 표현해야 한다. 장르도 설명해야 하며, 컨셉트도 가르쳐야 한다.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카피'는 벅차다. 한 줄 문장을 통해 영화의 모든 것을 상상하게 만들어 내야 한다. 그래서 혹자는 카피를 세상에서 가장 짧은 문학이라 말한다.

하지만 카피의 운명은 결국 흥행에 좌우된다. 카피라이터 윤수정씨는 "'개봉박두'라는 후진 카피를 써도 영화가 흥행하면 성공한 카피가 되고, 5개월이 걸려 힘들게 카피를 써도 영화가 실패하면 빛을 보지 못한다"며 카피가 가지고 있는 태생적 비극을 설명했다. 영화가 흥행사업인지라 카피 역시 흥행에 좌우될 수 밖에 없다는 이야기다.

'20자의 마술', '한 줄의 미학'이라는 거창한 수식어를 달고 있는 영화 카피. 그러나 결국 흥행에 종속될 수 밖에 없는 운명. 그럼에도 불구 수많은 카피라이터들이 오늘도 내일도 카피를 쓰고 또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하고, 대중과 교감하는 매력 때문이다.

윤수정씨는 카피란 무엇이냐는 질문에 '립라인 또는 아이라인'이라고 답했다. 없어도 상관은 없지만 '립라인'을 하면 입술이 더 또렷해 보이고, '아이라인'을 하면 눈이 더 커 보인다는 말로 카피의 역할을 대신 설명한 것. 관객이 영화에 다가설 수 있도록 발걸음을 유도했다면…. 그리고 그 한 편으로 인생이 바뀌었다면…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 흥행을 떠나 카피가 존재하는 이유다.

[스포츠서울닷컴ㅣ김지혜기자]